전우재
새삼 돌이켜보자. 원주시정부는 왜 그토록 아카데미극장을 철거하고 싶었을까? 당시 시정부는 극장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명이라도 받은 것마냥 필사적이었다. 제대로 된 소통을 거부한 채 일방적으로 정책을 뒤집더니, 숱한 위법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졸속으로 철거를 밀어붙였다. 공무원과 용역을 동원해 시민들에게 수차례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나? 극장이 무너지고 나서도 한동안 의문이었다.
말로는 돈 때문이라고 했다. 철거 발표 당시 원강수 원주시장은 “극장 보존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다”며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극장을 철거하고 야외공연장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적으로 부산 F1963, 청주 동부창고, 속초 칠성조선소 등 근현대 문화유산을 활용한 공간이 핫플레이스로 한창 주목받는 시기였다. 한국에서 원형을 간직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이자 국가유산청이 등록문화재 지정을 거듭 권고한 문화유산을 없애고 어디에나 있는 흔하디흔한 야외공연장을 짓는다는 건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보더라도 비합리적이었다. 무엇보다 야외공연장 조성 비용(시비 16.5억 원)이 극장 보존 비용(시비 21억 원)과 실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바람에 더 우스운 논거가 되고 말았다. 원 시장이라고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돈 때문에 극장 철거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면 ‘전임 시정 사업 지우기’라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민선8기 초반에 제동이 걸린 사업이 수두룩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규모를 축소해서라도 상당수는 그대로 진행했다. 그런데 유독 아카데미극장만큼은 거의 정권의 생사를 거는 것마냥 보존이 기정사실화된 사업을 억지로 뒤집고 철거를 강행했다. 지역 사회 갈등이 커지든, 시장 본인의 불통 이미지가 강화되든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다 감수하고서라도, 극장은 꼭 부수어야 한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무리 전임 시정 사업을 지우고 싶더라도, 이럴 정도의 일인가? 정치적 행보에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을 텐데? 이 또한 의문부호가 달릴 수밖에 없다.
원강수 시장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언젠가 속내를 밝히지 않는 이상 명확히 알 길은 없을 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최근 다른 관점에서 철거 이유를 짐작할 힌트를 얻었다. 아카데미의 친구들 연구모임 ‘돌멩연구소’에서 함께 읽은 발제문¹에서다. 이 발제문은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미국 철학자 마이클 하트가 제시한 ‘삶정치(biopolitics)’ 이론을 다루고 있는데, 삶정치론이 궁극적으로 커먼즈 운동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는 논지를 담고 있다. 읽어 보니, 아카데미극장 보존 운동과 그 이후의 활동에 접목할 지점이 많았다.
발제문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은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포섭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고 거기서 또 더 나아가 지구의 삶 전체를 포섭(2p)”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와 주체성이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삶권력(biopower)’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개인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잣대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쉽다. 집을 거주 공간이 아닌 투자 상품으로 인식하고, 자녀 교육을 스펙 설계의 일환으로 치환하고, 취미와 인간관계조차 취업을 위한 도구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전쟁이 벌어져도 “방산주가 오르겠네”라며 주가의 등락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계산적 반응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자본이 추구하는 욕망이 곧 내가 추구하는 욕망이 되는 셈이다.
이래서야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삶이라는 게 그저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개개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창조적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개인 간의 다양성, 한마디로 ”차이를 발생시키는 힘(4p)”이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권력은 이 힘을 철저히 억누른다. 개개인의 차이에서 생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어떻게든 수량화하고 동질화한다. 이를테면, 누군가 독특한 감정과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표현하면, 자본은 그걸 앨범 판매량이나 조회수, 광고 단가 따위로 계산 가능하게 바꾸고 그 틀 안에서 감정과 아이디어의 가치를 저울질하도록 만든다. 결국 개개인의 차이는 시장 논리에 포획돼 쉽게 생명력을 잃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본이 정해놓은 틀 속에서 비슷비슷한 삶을 반복하게 된다.
삶정치론은 이런 “삶권력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는 것(6p)”이 목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발제문에 따르면, 그 해방을 이뤄낼 주체는 ‘특이성들의 다중’이다. 앞서 말한 개개인의 차이, 즉 ‘특이성’이 정해진 틀을 깨부술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특이한 힘들이 자유롭게 상호작용 하는 협동적 관계가 우리를 삶권력의 포획에서 해방시키고, 이후의 새로운 삶형태를 구현할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이어진 윤석열 퇴진 촉구 광장이 하나의 예다. 여성, 청년, 농민, 성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주체가 상호작용하고 협동하며 힘을 모으지 않았던가. 특이성들의 다중이 모였다면, 중요한 건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다. 모인 의미가 있도록 계속 뭘 같이 해야 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공통적인 활동’을 통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해야 한다. 이렇게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활동’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발제문은 삶정치론이 커먼즈 운동, 즉 커머너의 커머닝과 연결된다고 본다.
1 정남영,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2018 http://commonstrans.net/?p=1061

모두가 시키지 않았는데 저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노란 텐트 안에서의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