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화
총체적 난국의 시대다. 북극과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붕괴의 상황에서 종말은 더 이상 머나먼 미래의 상상이 아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절체절명의 감각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생태적 붕괴라는 전방위적 내란과 싸우고 있다.
도심의 지반은 과도한 개발로 인해 생긴 씽크홀로 꺼져내리고, 산불은 서울 수십 배 면적의 숲을 삼켜버렸으며, 무려 30명의 목숨이 불길에 스러졌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역량을 잃었고, 사회는 혼돈 그 자체다. 코스피는 추락하고, 주식시장은 바닥을 찍었으며, 자영업자의 폐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공실률은 치솟고, 도심은 공동화 현상과 젠트리피케이션의 극렬한 대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수도권으로 몰리고, 지방은 절멸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이런 문제는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인구 36만의 중소도시 원주는 강원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지만, 문화•교통 인프라의 부재라는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난 몇 년간 도시 규모는 확대되고 외형은 성장해 왔으나, 정작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기반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통 인프라는 수년째 낙후된 상태로 시민들의 일상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으며, 문화예술 공간은 턱없이 부족해 지역 주민들은 문화생활을 위해 타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실정이다. 원주는 강원도 내 최대 도시임에도 구조적 한계는 개선되지 않은 채 인구위기를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그런 와중에 2023년, 하나 남은 단관극장을 지키기 위해 많은 시민들이 생업을 뒤로하고 극장 앞으로 모였다. 그것은 단지 오래된 극장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극장 자체로도 문화적·역사적 보존 가치가 충분했지만, 그때 우리가 모였던 진짜 이유는 이 지역에서 좀 더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23년 7월, 한여름의 극장 앞 아카데미 버스킹
‘행복’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매주 모이는 아카데미 친구들의 연구모임 ‘돌멩연구소’에서 함께 읽은 논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것”이라 말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최고의 상태에 이를 때 비로소 행복이 가능하며, 그 상태는 정적으로 멈춰있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동시에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다. 이성을 발전시키고 지적 탁월성을 기를 때 우리는 영혼의 최고 상태에 다다를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인간다운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곧 행위이므로, 반복적이고 탁월한 행위를 통해 품성을 길러낸다면, 행복은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공동체의 정의(Justice)는 개인의 행복을 북돋우고, 탁월한 영혼을 지닌 개인은 공동체의 버팀목이 된다.
결국 개인과 공동체는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존엄한 삶을 실현해 가는 경로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치 참여를 통해 구성원의 권리를 실현하는 ‘참여민주주의’, 둘째, 경제적 재분배와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여 생존 기반을 확보하는 ‘경제민주주의’, 셋째, 문화예술을 통해 개인의 다양하고 창조적인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민주주의’의 구현이다.
우리는 바로 그 세 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단관극장을 지켰다. 조금 더 오래, 이 지역에서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극장을 지킨 경험은 이제 우리의 공공재인 ‘커먼즈(commmons)’를 수호하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대량의 폐기물을 쏟아낸 후 다시 인공적인 구조물을 세우는 일보다, 이미 공동체가 함께 소유하고 가꿔온 자원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에 대한 진정한 해법일지 모른다.